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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페니실린 발견은 인류를 어떻게 구했을까?

by 호두와피칸 2025. 9. 16.

 

 

 

20세기 초까지 인류는 지금 우리가 쉽게 치료하는 감염 질환에도 목숨을 잃곤 했습니다. 작은 상처가 곪아 패혈증으로 번지면 손쓸 방법이 없었고, 출산 후 발생하는 산욕열로 많은 산모가 세상을 떠났어요. 폐렴이나 성병 같은 질환도 치명적이었고, 수술 후 감염은 환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의학자들은 세균이 질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루이 파스퇴르와 로베르트 코흐의 연구를 통해 세균설이 확립되었고, 조셉 리스터가 무균 수술법을 도입하면서 위생과 소독의 중요성도 널리 퍼졌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세균의 존재를 알면서도, 몸속에 들어온 세균을 직접 제거할 방법이 없었다는 점이었어요. 의사들은 감염된 부위를 절단하거나, 소독제를 바르는 정도의 대처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1930년대에 설파제 계열 약물이 등장하면서 잠시 희망이 보였지만, 모든 세균에 효과적인 것은 아니었고 부작용도 많았어요. 특히 연쇄상구균 감염에는 뚜렷한 효과를 보였고 폐렴구균 폐렴의 사망률도 줄였지만, 결핵에는 전혀 듣지 않았고 내성과 부작용 문제로 한계가 분명했습니다. 인류는 여전히 전염병과 수술 감염을 근본적으로 막아줄 강력한 치료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알렉산더 플레밍의 페니실린 발견

 

1928년 영국 세인트 메리 병원에서 세균학을 연구하던 알렉산더 플레밍은 우연한 장면을 목격했어요. 포도상구균을 배양하던 접시에 푸른 곰팡이가 떨어졌는데, 신기하게도 곰팡이 주변의 세균이 투명하게 녹아 사라져 있었던 겁니다.

 

플레밍은 이 곰팡이가 만들어내는 물질이 세균을 죽인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곰팡이 속 이름을 따 ‘페니실린’이라 명명했습니다. 그는 1929년 이 사실을 학술지에 발표했지만, 문제는 이 물질을 안정적으로 추출하고 정제하는 기술이 없었다는 점이었어요. 실험실 수준에서는 효과를 보였지만 실제 환자 치료로 이어지기에는 한계가 분명했습니다. 게다가 위산에 약해 경구투여가 어렵고, 신장을 통해 너무 빨리 배설돼 혈중 농도가 오래 유지되지 못했어요. 당시엔 생산량이 워낙 부족해 환자의 소변에서 약을 회수해 다시 투여할 정도였습니다.

 

이때까지 페니실린은 흥미로운 연구 성과에 불과했고, 사람들에게 널리 쓰일 단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플레밍의 관찰은 후대 연구자들에게 길잡이가 되었고, 항생제 시대의 문을 여는 씨앗이 되었어요.

 

 


 

⚙️ 플로리·체인의 개발과 전시 대량생산

 

페니실린을 실제 치료제로 발전시킨 사람들은 옥스퍼드 대학의 하워드 플로리에른스트 체인이었습니다. 1939년부터 그들은 페니실린 성분을 대량으로 추출하고 정제하는 방법을 연구했고, 동물실험에서 탁월한 효과를 확인했어요. 1941년 옥스퍼드에서는 중증 감염으로 고통받던 경찰관 알버트 알렉산더에게 투여해 눈에 띄는 호전을 보였지만, 약이 부족해 치료를 이어가지 못했고 결국 환자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1942년 미국에서는 출산 후 산욕열에 시달리던 앤 밀러라는 여성이 페니실린 치료를 받고 극적으로 살아났습니다. 이 사례는 전 세계 의료계에 큰 반향을 불러왔고, “페니실린이 실제로 사람을 살렸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어요.

 

제2차 세계대전은 페니실린 개발을 가속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쟁터에서 감염은 총상보다도 더 치명적인 적이었기 때문에, 미국과 영국은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어요. 특히 미국 제약사 화이자가 심층 발효 공정을 성공시키면서 산업적 대량생산이 가능해졌습니다. USDA 연구팀이 옥수수 침지액을 활용한 배양법을 개발하고, 화이자가 심층 발효(deep-tank) 공정을 산업 규모로 완성하면서 페니실린 생산량은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1944~45년경에는 전선과 민간 병원에서 널리 사용될 수 있었고, 많은 병사와 민간인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 공로로 1945년 플레밍, 플로리, 체인은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때부터 페니실린은 단순한 실험실 성과가 아니라, 인류를 구한 의학 혁신으로 자리 잡게 되었어요.

 

 

 

페니실린 발견은 인류를 어떻게 구했을까?

 

🛡️ 인류를 구한 효과와 항생제 내성의 교훈


페니실린의 도입은 인류 건강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전쟁 부상자의 사망률은 크게 줄었고, 폐렴이나 수막염 같은 세균성 감염도 치료 가능해졌어요. 출산 후 산모가 감염으로 세상을 떠나는 비극 역시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수술은 훨씬 더 안전한 의료 행위가 되었고, 현대 의학의 여러 분야가 크게 발전할 수 있었어요.

 

페니실린은 세균의 세포벽 합성을 막는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세균은 세포벽이 없으면 스스로 버틸 수 없기 때문에 결국 파괴되고 말지요. 중요한 점은 인간 세포에는 세포벽이 없기 때문에, 페니실린은 세균에만 선택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덕분에 효과는 강력하면서도 비교적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인류는 곧 새로운 문제를 마주했습니다. 바로 항생제 내성입니다. 페니실린이 널리 쓰이자, 일부 세균은 스스로 변이를 일으켜 약물에 저항하기 시작했어요. 특히 황색포도상구균은 ‘페니실리나아제’라는 효소를 만들어 페니실린을 분해했어요. 이에 대응해 1959년 메티실린이 개발됐지만, 불과 2년 뒤인 1961년에는 내성이 생긴 MRSA가 보고되며 문제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후 과학자들은 페니실린의 성공을 발판 삼아 잇달아 새로운 항생제를 내놓았습니다. 1943년 스트렙토마이신이 결핵 치료제로 등장했고, 1948년에는 테트라사이클린 계열이 보고되어 1950년대에 널리 쓰였으며, 1952년에는 에리스로마이신이 등장해 치료 범위가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인류는 본격적인 ‘항생제 시대(Antibiotic era)’에 들어섰고, 페니실린은 그 문을 연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페니실린의 발견은 수많은 생명을 구한 기적이자, 의학사에 남을 혁명적 전환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적을 오래 지속하기 위해서는 현명한 사용이 필수입니다. 항생제를 불필요하게 남용하지 않고, 필요한 경우 정확히 사용해야만 내성의 확산을 막을 수 있습니다. 백신 접종과 위생 관리, 항생제 관리 프로그램은 모두 페니실린이 남긴 중요한 교훈을 이어가는 방법이에요.

 

 


 

마무리

페니실린은 단순히 한 가지 약이 아니라, 의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발견이었습니다. 우연한 관찰에서 출발해 과학자의 노력, 그리고 전쟁 속에서의 대량생산을 거쳐 전 세계 수많은 생명을 구했어요. 동시에 우리는 내성이라는 숙제를 함께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의료 환경은 페니실린의 덕분이고, 앞으로도 이 기적을 지켜가기 위해서는 현명한 선택이 필요합니다. 페니실린의 역사는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과 미래에도 계속 이어지는 인류의 생존 전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