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중세 기사들이 먹었던 '에너지바' - 고열량 휴대식의 역사

중세에도 '에너지바'가 있었을까?

— 행군과 원정을 버틴 고열량 휴대식의 역사

 

오늘날 우리가 등산이나 운동 전에 먹는 에너지바는, 한 손에 쥘 수 있을 만큼 작고, 한 번에 많은 에너지를 보충할 수 있는 음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개념은 현대에만 있었던 게 아니에요.

핵심은 단순합니다. 가볍고 단단하며 오래가고(저수분), 한 조각으로도 칼로리를 확 올려주는 것.

“빵+꿀(설탕)+견과+말린 과일” 조합의 고열량 간식과 두 번 구운 저장빵은 중세의 기사·병사·순례자들에게 훌륭한 ‘연료’였어요.

이 글에서는 중세 유럽에서 ‘에너지바’처럼 쓰였던 대표 휴대식을 하나씩 알아보겠습니다.

 

 


 

🥖 딱딱하지만 오래가는 두 번 구운 빵 - 중세 군대의 저장식

 

중세 유럽의 군대와 함대에서 가장 기본이 된 휴대식은 ‘비스킷’입니다.
라틴어로 panis biscoctus라고 하는데, 뜻은 ‘빵을 두 번 굽다’예요.
중세 군대의 저장식이었던 이 빵은, 한 번 구운 빵을 다시 오븐에 넣어 수분을 완전히 날려버리면 치아가 부서질 정도로 단단하면서도 몇 달, 심지어 1년 가까이도 상하지 않는 저장식이 탄생합니다.

 

병사들은 이 빵을 그냥 씹기엔 너무 힘들어서, 주로 물이나 와인에 적셔 부드럽게 만들거나, 수프에 넣어 불려 먹었습니다.
항해 중인 선원들도 똑같은 방식을 사용했죠.
이 빵은 맛은 단조롭고 질겼지만, 부패 걱정 없이 긴 원정을 버틸 수 있는 생명줄이었습니다.

 


 

🌾 빠르게 만들어 먹는 귀리 오트케이크 - 즉석 전투식

 

스코틀랜드와 북유럽 병사들은 종종 오트케이크를 직접 구워 먹었습니다.
귀리는 추운 기후에서도 잘 자라는 곡물이라 이 지역에서 주식처럼 쓰였죠.
만드는 방법은 단순합니다. 귀리 가루를 물과 섞어 반죽을 만들고, 얇게 눌러 뜨거운 철판이나 돌 위에 올려 굽는 거예요.

병사들은 안장 밑에 얇은 철판을 넣어 다니며, 이동 중에도 잠시 멈춰 불을 피우고 오트케이크를 구워 먹었습니다.

 

이건 장기 저장식이라기보다는 즉석 전투식에 가까웠지만, 재료가 간단하고 휴대가 쉬워 이동 중에도 쉽게 조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추운 날씨에 뜨거운 오트케이크 한 장은 든든한 한 끼가 되었죠.

 


 

🍯 꿀과 견과로 만든 고급 간식 - 중세 고열량 전투식

 

중세 상류층과 기사들이 즐겨 먹던 고열량 간식이 있습니다.

바로 꿀, 견과류, 말린 과일, 향신료를 섞어 만든 단단한 과자입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이탈리아의 팬포르테(Panforte)와 스페인의 투론(Turrón)입니다.

 

중세 기사들이 먹었던 '에너지바' - 고열량 휴대식의 역사
Panforte

 

  • 팬포르테(Panforte)
    13세기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시작된 과자로, 이름 그대로 ‘강한 빵’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꿀과 아몬드, 헤이즐넛, 말린 무화과나 오렌지 껍질, 그리고 계피·정향 같은 향신료를 넣어 오븐에서 구워 단단하게 굳혔습니다.
    설탕이 귀하던 시절, 꿀의 진한 단맛과 향신료의 향은 귀족과 부유한 기사들의 사치품이었지만, 장기 보관과 높은 칼로리 덕분에 원정길에도 적합했습니다.
  • 투론(Turrón)
    스페인의 전통 누가로, 꿀과 아몬드, 달걀흰자를 섞어 만든 과자입니다.
    무어인(중세 이슬람권) 문화의 영향을 받아 전래되었으며, 단단한 형태와 부드러운 형태가 모두 있습니다.
    한 조각만 먹어도 당분과 지방이 풍부해 금세 힘이 났고, 달콤함 덕분에 사기 진작에도 효과가 있었습니다.

이런 꿀·견과 압축 과자는 당시 기준으로는 값비싼 편이었지만, 기능적으로는 오늘날의 초콜릿 에너지바와 거의 같았습니다.

 


 

🍐 과일을 농축한 달콤한 블록 - 귀족과 기사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중세 간식

 

‘퀸스(Quince)’는 우리나라의 모과와 비슷한 과일이에요.
겉은 노랗고 단단하며, 생으로 먹으면 떫고 신맛이 강하지만, 설탕이나 꿀과 함께 오래 끓이면 향긋하고 달콤해집니다.

 

중세 유럽 사람들은 이렇게 끓인 퓌레를 식혀서 단단한 블록 형태로 굳혔습니다.
이것이 ‘퀸스 페이스트(Quince paste)’이며, 스페인에서는 ‘멤브리요(membrillo)’라고 불렀습니다.


치즈와 함께 먹으면 맛이 훨씬 부드러워져, 귀족과 기사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디저트 겸 간식이 되었죠.
작게 썰어 먹을 수 있고, 오래 보관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휴대식으로도 훌륭했습니다.

 


 

🍬 작지만 강한 단맛

 

마지막으로 소개할 건 컴핏(Comfit)입니다.
이건 씨앗이나 작은 견과에 설탕을 여러 겹 입힌 작은 사탕이에요.

 

여기 쓰이는 대표적인 씨앗이 애니스(anise, 회향씨)캐러웨이(caraway, 캐러웨이씨)입니다.
이 두 씨앗은 특유의 향이 강하고, 소화를 돕는 효과가 있어 식후 입가심으로 적합했습니다.
당시 설탕은 매우 귀한 재료였기 때문에, 컴핏은 사치품이자 작은 ‘당분 폭탄’이었습니다.
병사들은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힘이 떨어질 때 한 알씩 꺼내 먹었죠.

 


 

⚡ 공통된 비밀

 

이 음식들의 공통점은 분명합니다.

  1. 저수분: 부패를 막고 오랫동안 보관 가능
  2. 고밀도 칼로리: 작은 양으로도 많은 에너지
  3. 휴대성: 전투와 장거리 이동에 적합

중세 기사들의 ‘에너지바’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음식을 넘어, 생존과 전투력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전략 식량’이었습니다.
오늘날 등산이나 운동 전에 챙겨 먹는 에너지바처럼, 중세 유럽 병사와 기사들이 즐겨 먹던 고열량 전투식도 그들에게 긴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힘이었죠.